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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홍보마당
작성자 데메트리아
작성일 2019/10/28
ㆍ조회: 29  
[봉쇄의 울타리에서] 주님의 빛, 어머니의 기도

[봉쇄의 울타리에서] 주님의 빛, 어머니의 기도

 

 

창가 눈부신 햇살

짙은 초록 숲 창가에 남겨 두고

여름내 고동치는 심장 엿보는

다른 창가 만나는데

 

어느새 계절 바뀌고 낯익은 자리 돌아오니

이전의 창가 새롭게 황홀한 단풍으로 맞아주네

 

떠난 자리 지키며 여름내 꾸준히 키워 온

영근 가을 내어 주는 맘 물씬 다가옴은

시월의 엄마 마음이리라

 

스페인 마드리드의 어느 높은 건물 창문에서는 온종일 초록색 불빛이 퍼져 나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고 한다. 작년 회의차 마드리드에 갔던 우리 수녀원의 두 수녀님도 그 불빛을 보고 정체를 궁금해했다. 알고 보니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건물 주인이 내부에 경당을 마련하고 감실에 불을 밝혀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현존을 알리려고 설치한 조명이었다.

 

점점 식어 가는 유럽 교회라지만, 여전히 신앙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눈앞의 현실은 캄캄해도 언젠가는 신앙의 꽃이 다시 활짝 피어나리라는 희망이 엿보인다. 믿음과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에 현실이 아닌 앞날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 수녀원에도 그와 비슷한 길잡이 불빛이 있다.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지는 않지만 밤낮으로 쉬지 않고 깜빡이는 불빛. 그래서 처음에는 ‘분심이’라 불리다가 점차 ‘무관심이’에서 결국에는 ‘귀염둥이’로 불리게 된 이 불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두컴컴한 세상에 당신의 빛을

 

수녀원 성당의 중앙 천장에는 도미니칸 문장이 새겨진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그 주위에 매달린 열두 개 조명등은 미사 때 제대를 비추는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두 개의 등이 전원을 내린 뒤에도 계속 깜빡였다. 그래서 다른 등으로 바꿔 달려고 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같은 등을 구해 보려고 이곳저곳에 문의해 보면 ‘이제 그런 제품은 시중에 없고, 부속도 구하기 어려우니 이참에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낫겠다.’는 관계자의 답변을 들을 뿐이었다. 졸지에 우리 수녀원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곳이 되어 버렸다. 찾아온 가족과 조카들도 우리 수녀들을 구석기 시대 사람 대하듯 하니 별수 있겠는가.

 

하여튼 등을 교체하려던 생각은 수포로 돌아갔다. 모든 등을 바꾸자니 생각지도 않은 큰 공사를 해야 했고, 무엇보다 나머지 멀쩡한 등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은 낭비였다. 다행히 오작동하는 등은 그대로 둬도 별 지장이 없다고 하니 결국 우리는 이 등과 계속 함께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작년 여름, 우리 수녀원은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건물 내부 공사를 하게 되었다. 두 달 넘는 공사 일정 동안 대부분의 수녀가 임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나도 잠시 창고에서 지내게 되었다.

 

방 창문만 열면 훤히 보이던 아름다운 경치를 뒤로하고 창고에서의 첫날, 밤 독서 기도를 마친 뒤 여느 때처럼 밤하늘을 보려고 창문 커튼을 젖혔다가 깜짝 놀랐다. 낮에는 티 나지 않던 저 ‘분심이’들이 어둠 속에서 성당 창문 밖으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말로만 듣던 그 마드리드의 감실 불빛이 떠오름과 동시에 예수님의 현존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세상으로 당신의 빛을, 당신의 생명을 보내시는 것 같았다. 평상시 하던 기도가 그날따라 더 간절하게 터져 나왔다.

 

“주님, 이 밤에 힘들어 하는 이들을 기억해 주소서. 지낼 곳이 없는 이들과 어둠 속에서 불안해하고 쫓기는 이들을 기억해 주소서.”

 

그날부터 창고 창가는 나에게 특별한, 주님과 만나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희망하는 소중한 곳이 되었다.

 

 

수많은 이의 소박한 기도

 

공사도 어느새 마무리되었다. 이곳에서 주님과 함께 보낸 오붓한 시간이 벌써 애틋해지기 시작했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이튿날 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창문을 열었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그사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계절은 창가 풍경을 어느새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으로 눈부시게 바꿔 놓았다.

 

성모상과 주위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짐 정리도 잊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아마도 내가 떠나온 그곳을 아쉬워할까 봐 성모님께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신 걸까. ‘타보르산의 예수님 창가’에서 ‘일상의 성모님 창가’로 돌아온 느낌이다.

 

어머니가 남겨 주신 닳고 닳아 낱장을 실로 엮은 묵주 기도 책을 펼쳤다. 빼곡히 적힌 기도 지향과 축일, 기일 등의 표시 자국들, 가장 마지막 장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지속적인 로사리오 기도’ 회원 모집 안내지가 꽂혀 있었다. 이 기도 책을 보자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그 어떤 큰 세력도 아닌 수많은 이의 소박한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우리 관상 수녀들의 사명이요 삶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몸소 그리 하셨듯이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저 깜빡이는 불빛처럼 소리 없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인 듯싶다. 그래서 이 묵주 기도 책은 나에게 희망의 책이며 나를 키워 준 책이자 이 세상을 위로하고 씻어 주는, 어쩌면 세상을 구원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 기도 책을 통행권 삼아 천국 문을 통과하지 않으셨을까.

 

‘성모님, 그리고 어머니 감사합니다.’

 

[경향잡지, 2019년 9월호, 이영숙 예수 마음의 데레사(마리아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

카톨릭 굿뉴스 자료실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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