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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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야 댓글 0건 조회Hit 2,114회 작성일Date 20-04-08 17:34본문
큰아들이 출장에서 돌아온다.
녀석이 20일 간의 북미 출장에서 돌아왔다. 아들은 지난 3월 2일에 미국과 캐나다 7개 도시를 경유할 계획으로 떠났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코로나19’의 전파가 ‘주의 단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따라서 세계 각국이 한국인에 대한 특별감시와 입국 규제로 술렁이는 시기였다. 설령 입국에 문제가 없다손 치더라도 현지에서의 일이 순조롭지 못하리라는 예측도 했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서명한 계약이고, 아직 북미의 공항은 열려 있었다. 되돌아오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계약 이행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3월 2일까지 만해도 ‘코로나19’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안이했다. 덕분에 녀석은 동행한 두 명의 일행과 별 탈 없이 JFK공항에 안착했고 뉴욕을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일정을 소화했단다. 우리나라는 대구의 신천지를 거점으로 대폭발이 이루어지고 있던 터였다. 미국도 ‘코로나19’ 확산이 시간문제이리라는 예상 탓에 걱정은 불어났다. 그러나 아들과의 직접 통화는 자제했다. 시차가 큰데다 도시까지 옮겨 다니는데, 자칫 단잠을 깨울까 염려스러웠다. 카카오 톡으로 안부만 묻곤 했다. 답은 도통 ‘꿩 구워 먹은 자리’였다. 사내놈들이란...... 원!
큰아들이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3월 19일 오후 2시경, 봄바람이 태풍처럼 몰아쳐 전날 밤부터 강풍주의보가 내려졌었다. ‘비행기는 연착륙할 수 있을까’ 속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마침내 전화기가 리듬을 탔다.
“아버지! 이제 막 도착해서 발열검사 마치고 짐 찾으러 대기하고 있어요.”
“응! 걱정했는데 잘 왔구나.”
“스마트 폰에 앱(AP)을 설치했고, 2주간 자가 격리하라는 권고를 받았는데요. 곧바로 집으로 가겠습니다.”
“응! ......어? ...어디로 온다고...?”
“집으로요. 엄마 아버지한테! 저희 집에는 애기가 있어서 안 되잖아요. 하하하...”
“응, 그렇지! 아기에게 전염되면 안 되지.”
다짜고짜 들이댔다. 해외여행 끝에 귀가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하기야 생후 다섯 달이 채 안 된 손자가 녀석의 집에 있으니 만에 하나 아기에게 전염되면 큰일이다. 하지만 ‘짜~식이, 평소에는 제 처가로 엎어지기만 하더니 급하니까 어미 애비야?’하는 생각이 스쳤다. 소식을 들은 순간 아내는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내 치울 것도 없는 녀석의 방을 쓸고 닦고 침대를 정리했다.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으로써 우리 집은 갑작스레 자가 격리 장소가 돼버렸다. 현관에 들어선 아들을 우리는 마스크를 쓴 채 ‘가족적 거리’를 두고 반겼다. 그리고 생활수칙을 상의했다. 네가 쓰던 방을 써라. 현관에 딸린 화장실을 사용해라. 밥은 네 방 앞에 따로 차려주마. 마스크는 필수이며 소소한 것들은 전화나 문자로 소통하자. 사용한 수건과 옷가지 등은 따로 세탁한다. 등등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했다. 그러나 칙(則)을 정하는 것과 그것을 지키는(守) 것 사이에는 심각한 고통이 따랐다.
먼저 공간상의 문제였다. 큰아들의 방은 동향이라서 아침볕이 좋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과 방문을 열면 환기가 잘 되고 환하게 밝다. 그런데 이 녀석이 시차 적응을 핑계로 방문을 처닫고 들앉아 있다. 이삼일 지나면서부터는 데스크 톱 모니터를 보며 게임을 하느라 아예 커튼을 치고 죽친다. 그러다가도 수시로 전화와 이메일로 업무 처리를 하는 눈치다. 그러니 간섭은커녕 답답하기 짝이 없을 따름이다.
둘째는 습성과 습관의 문제였다. 제 살림을 차려 나간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습성을 다시 목격하게 된 것이다. 화장실 하나를 독차지하고 샤워를 하면서도 물기어린 알몸으로 양양하게 걸어 나오는 버릇은 여전히 제 엄마를 질색하게 했다. 아들 두 놈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목욕시킨 내 잘못이다. 녀석의 빨래는 따로 모아서 해야 했고, 속옷은 삶아야 했다. 그런데도 제 빨랫감을 제 자리에 내놓지 않는 것도 그대로였다. 더더욱 못마땅한 것은 어쩌다가 듣게 되는 상스러운 말들이었다. 제 친구들과 전화로 키득대다가 내뱉는 욕설들이 내 세반고리관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뭐야! 가정을 꾸려 자식까지 낳은 녀석이, 말본새하고는......, 쯧쯧쯧.”
애먼 아내에게 눈살을 찌푸려 보인다. 그리고는 이런 녀석의 행태를 겪으면서 새삼 ‘며느리’의 고마움을 다시금 느꼈다.
“아, 우리 며늘애가 이 꼬락서니를 다 봐주는구나! 용하다 용해.”
“그러게요, 설마 제 처 있는데도 그러겠어요?”
셋째는 삼시세끼 때마다 밥상을 따로 차리고 비닐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일이었다. 매번 그릇들을 삶고 뜨거운 물에 담가내는 일들은 여간 수고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밥상을 물리던 녀석이 느닷없이 제 어미를 부른다.
“엄마! 식탁에 단백질이 부족해요. 쩝쩝......”
“뭐! 단백질이 부족하다고, 호흐흐흐, 어머나 세상에, 참!”
미운 놈이 혀 내미는 격이다. 아내와 나는 마주보고 웃음을 참느라 허리를 꺾어댔다. 그렇잖아도 큰애가 오고 나서 금세 냉장고가 비었다는 말을 들었던 터다. 큰애는 원래 뭐든 잘 먹었다. 그런 큰애를 키우면서 아내는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이제는 ‘며느리의 남편’이 되어버린 지 4년째다. 뭘 먹고 어떻게 지지고 볶고 사는지 간섭은 물론 관여도 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아내다. 그러니 녀석의 느닷없는 단백질 타령에 웃어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야! 주는 대로 먹어. 지금, 그렇잖아도 너 왔다고 특별히 신경 쓰는 거야! 아니면 단백질 값을 내놓던가.”
“그럼, 제가 단백질 값을 드릴게요. ......한 이십 만원?”
“뭐, 뭐야! 이십 만원, 치사하게 이십 만원!”
“엄마! 치사하긴 한데, 정산(定算)을 해봐야겠지만, 이번 출장은 손해 본 것 같아. 그리고 코로나19로 업황의 황금기인 4월과 5월을 그냥 날려버릴 게 뻔해요! 이 사태가 길어지면 직원들 봉급도 챙기기 힘들어요.”
순간 아내와 나는 큰아들의 눈을 바라봤다. 녀석은 담담한 눈동자로 엄마와 아버지를 마주보고 있었다.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헛고생을 한 아들이 안타까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세 도시를 끝으로 나머지 3개 도시의 미국 일정이 셧다운(shutdown)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는 혹시나 하고 토론토로 옮겨갔는데, 그 다음 날 토론토의 모 호텔에 묶여버렸단다. 호텔에서 뒹굴다가 일정을 중단하고 항공편을 국적기로 바꾸어 타고 내 나라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래 이 출장은 아들 녀석이 주도해서 기획했단다. 당장 현지에서 이익을 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국내에서 반응이 좋은 브랜드를 북미에 선보이고, 그 브랜드들이 북미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향후 월드클래스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의도였다. 미래가치를 위한 홍보 및 마케팅인 셈이다. 따라서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닌데 악재가 덮친 것이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우리 부부도 함께 2주간의 자가 격리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각심은 느슨해졌다. 특히 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아내는 무심코 아들의 방을 드나든다. ‘필요한 것 없냐?’ ‘뭐 먹고 싶냐?’ ‘뭘 해주랴?’ 그때마다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마스크를 쓰고 비닐장갑을 껴서 괜찮단다. 그 동안 조심스레 청해오는 작은 모임도 ‘만에 하나’를 가정하여 모두 꺼렸다. 개중에는 “야! 괜찮아. 나와 인마!”하는 친구 놈들도 더러 있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좀이 쑤셔 힘들어 했다. 게임도 지쳐 책들을 뒤적거렸다. 제 처(妻)도 처이려니와 어린 아들이 무척 보고 싶다고 했다. 화상통화를 하면서 아기를 어르는 소리도 들리곤 했다. 아내와 나는 그림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너를 그렇게 키웠단다. 자식아!”
“젊은 애가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거의 한 달이나 되니 그렇겠지, 코로나19가 아니라면 어디 2주씩이나 여기에 머물겠어? 어림없지. 이런 일은 다시없을 거야! 우리 집에, 2주간이나, 우리 아들로 와 있는 거.”
이래저래 고통과 고역이었지만 선물과 같은 시간이었다. 바이러스 검체 검사를 하고 돌아온 날 저녁에 캔 맥주를 들고 아들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사한 아파트에 대해서, 회사 상황과 출장 건에 대해서, 손자와 며느리에 대해서, 당장 닥쳐올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 두런 도란거리다 밤이 깊어갔다. 내가 마무리를 지었다.
아들아! 살아보니까 사람그릇 크기가 곧 능력의 크기더라. 품어 안아야 한다.
기본적인 가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invaluable) 가치, 그래서 누구도 돈으로 계산하려들지 않는 가치를 수호해라.
돈 처발라가며 자식교육 시키려 하지 마라.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아이들은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라.
그리고 아들아! 정확히 15일간 우리 아들로 있어줘서 좋았다. 수고했다.
녀석은 4월 3일 오전 10시 경에 ‘이상 없음’을 문자로 전송받고 저희 집으로 돌아갔다. 예의 “며느리의 남편”이 된 것이다.
2020. 4. 8.
장 라우렌시오.
녀석이 20일 간의 북미 출장에서 돌아왔다. 아들은 지난 3월 2일에 미국과 캐나다 7개 도시를 경유할 계획으로 떠났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코로나19’의 전파가 ‘주의 단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따라서 세계 각국이 한국인에 대한 특별감시와 입국 규제로 술렁이는 시기였다. 설령 입국에 문제가 없다손 치더라도 현지에서의 일이 순조롭지 못하리라는 예측도 했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서명한 계약이고, 아직 북미의 공항은 열려 있었다. 되돌아오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계약 이행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3월 2일까지 만해도 ‘코로나19’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안이했다. 덕분에 녀석은 동행한 두 명의 일행과 별 탈 없이 JFK공항에 안착했고 뉴욕을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일정을 소화했단다. 우리나라는 대구의 신천지를 거점으로 대폭발이 이루어지고 있던 터였다. 미국도 ‘코로나19’ 확산이 시간문제이리라는 예상 탓에 걱정은 불어났다. 그러나 아들과의 직접 통화는 자제했다. 시차가 큰데다 도시까지 옮겨 다니는데, 자칫 단잠을 깨울까 염려스러웠다. 카카오 톡으로 안부만 묻곤 했다. 답은 도통 ‘꿩 구워 먹은 자리’였다. 사내놈들이란...... 원!
큰아들이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3월 19일 오후 2시경, 봄바람이 태풍처럼 몰아쳐 전날 밤부터 강풍주의보가 내려졌었다. ‘비행기는 연착륙할 수 있을까’ 속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마침내 전화기가 리듬을 탔다.
“아버지! 이제 막 도착해서 발열검사 마치고 짐 찾으러 대기하고 있어요.”
“응! 걱정했는데 잘 왔구나.”
“스마트 폰에 앱(AP)을 설치했고, 2주간 자가 격리하라는 권고를 받았는데요. 곧바로 집으로 가겠습니다.”
“응! ......어? ...어디로 온다고...?”
“집으로요. 엄마 아버지한테! 저희 집에는 애기가 있어서 안 되잖아요. 하하하...”
“응, 그렇지! 아기에게 전염되면 안 되지.”
다짜고짜 들이댔다. 해외여행 끝에 귀가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하기야 생후 다섯 달이 채 안 된 손자가 녀석의 집에 있으니 만에 하나 아기에게 전염되면 큰일이다. 하지만 ‘짜~식이, 평소에는 제 처가로 엎어지기만 하더니 급하니까 어미 애비야?’하는 생각이 스쳤다. 소식을 들은 순간 아내는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내 치울 것도 없는 녀석의 방을 쓸고 닦고 침대를 정리했다.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으로써 우리 집은 갑작스레 자가 격리 장소가 돼버렸다. 현관에 들어선 아들을 우리는 마스크를 쓴 채 ‘가족적 거리’를 두고 반겼다. 그리고 생활수칙을 상의했다. 네가 쓰던 방을 써라. 현관에 딸린 화장실을 사용해라. 밥은 네 방 앞에 따로 차려주마. 마스크는 필수이며 소소한 것들은 전화나 문자로 소통하자. 사용한 수건과 옷가지 등은 따로 세탁한다. 등등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했다. 그러나 칙(則)을 정하는 것과 그것을 지키는(守) 것 사이에는 심각한 고통이 따랐다.
먼저 공간상의 문제였다. 큰아들의 방은 동향이라서 아침볕이 좋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과 방문을 열면 환기가 잘 되고 환하게 밝다. 그런데 이 녀석이 시차 적응을 핑계로 방문을 처닫고 들앉아 있다. 이삼일 지나면서부터는 데스크 톱 모니터를 보며 게임을 하느라 아예 커튼을 치고 죽친다. 그러다가도 수시로 전화와 이메일로 업무 처리를 하는 눈치다. 그러니 간섭은커녕 답답하기 짝이 없을 따름이다.
둘째는 습성과 습관의 문제였다. 제 살림을 차려 나간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습성을 다시 목격하게 된 것이다. 화장실 하나를 독차지하고 샤워를 하면서도 물기어린 알몸으로 양양하게 걸어 나오는 버릇은 여전히 제 엄마를 질색하게 했다. 아들 두 놈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목욕시킨 내 잘못이다. 녀석의 빨래는 따로 모아서 해야 했고, 속옷은 삶아야 했다. 그런데도 제 빨랫감을 제 자리에 내놓지 않는 것도 그대로였다. 더더욱 못마땅한 것은 어쩌다가 듣게 되는 상스러운 말들이었다. 제 친구들과 전화로 키득대다가 내뱉는 욕설들이 내 세반고리관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뭐야! 가정을 꾸려 자식까지 낳은 녀석이, 말본새하고는......, 쯧쯧쯧.”
애먼 아내에게 눈살을 찌푸려 보인다. 그리고는 이런 녀석의 행태를 겪으면서 새삼 ‘며느리’의 고마움을 다시금 느꼈다.
“아, 우리 며늘애가 이 꼬락서니를 다 봐주는구나! 용하다 용해.”
“그러게요, 설마 제 처 있는데도 그러겠어요?”
셋째는 삼시세끼 때마다 밥상을 따로 차리고 비닐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일이었다. 매번 그릇들을 삶고 뜨거운 물에 담가내는 일들은 여간 수고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밥상을 물리던 녀석이 느닷없이 제 어미를 부른다.
“엄마! 식탁에 단백질이 부족해요. 쩝쩝......”
“뭐! 단백질이 부족하다고, 호흐흐흐, 어머나 세상에, 참!”
미운 놈이 혀 내미는 격이다. 아내와 나는 마주보고 웃음을 참느라 허리를 꺾어댔다. 그렇잖아도 큰애가 오고 나서 금세 냉장고가 비었다는 말을 들었던 터다. 큰애는 원래 뭐든 잘 먹었다. 그런 큰애를 키우면서 아내는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이제는 ‘며느리의 남편’이 되어버린 지 4년째다. 뭘 먹고 어떻게 지지고 볶고 사는지 간섭은 물론 관여도 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아내다. 그러니 녀석의 느닷없는 단백질 타령에 웃어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야! 주는 대로 먹어. 지금, 그렇잖아도 너 왔다고 특별히 신경 쓰는 거야! 아니면 단백질 값을 내놓던가.”
“그럼, 제가 단백질 값을 드릴게요. ......한 이십 만원?”
“뭐, 뭐야! 이십 만원, 치사하게 이십 만원!”
“엄마! 치사하긴 한데, 정산(定算)을 해봐야겠지만, 이번 출장은 손해 본 것 같아. 그리고 코로나19로 업황의 황금기인 4월과 5월을 그냥 날려버릴 게 뻔해요! 이 사태가 길어지면 직원들 봉급도 챙기기 힘들어요.”
순간 아내와 나는 큰아들의 눈을 바라봤다. 녀석은 담담한 눈동자로 엄마와 아버지를 마주보고 있었다.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헛고생을 한 아들이 안타까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세 도시를 끝으로 나머지 3개 도시의 미국 일정이 셧다운(shutdown)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는 혹시나 하고 토론토로 옮겨갔는데, 그 다음 날 토론토의 모 호텔에 묶여버렸단다. 호텔에서 뒹굴다가 일정을 중단하고 항공편을 국적기로 바꾸어 타고 내 나라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래 이 출장은 아들 녀석이 주도해서 기획했단다. 당장 현지에서 이익을 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국내에서 반응이 좋은 브랜드를 북미에 선보이고, 그 브랜드들이 북미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향후 월드클래스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의도였다. 미래가치를 위한 홍보 및 마케팅인 셈이다. 따라서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닌데 악재가 덮친 것이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우리 부부도 함께 2주간의 자가 격리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각심은 느슨해졌다. 특히 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아내는 무심코 아들의 방을 드나든다. ‘필요한 것 없냐?’ ‘뭐 먹고 싶냐?’ ‘뭘 해주랴?’ 그때마다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마스크를 쓰고 비닐장갑을 껴서 괜찮단다. 그 동안 조심스레 청해오는 작은 모임도 ‘만에 하나’를 가정하여 모두 꺼렸다. 개중에는 “야! 괜찮아. 나와 인마!”하는 친구 놈들도 더러 있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좀이 쑤셔 힘들어 했다. 게임도 지쳐 책들을 뒤적거렸다. 제 처(妻)도 처이려니와 어린 아들이 무척 보고 싶다고 했다. 화상통화를 하면서 아기를 어르는 소리도 들리곤 했다. 아내와 나는 그림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너를 그렇게 키웠단다. 자식아!”
“젊은 애가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거의 한 달이나 되니 그렇겠지, 코로나19가 아니라면 어디 2주씩이나 여기에 머물겠어? 어림없지. 이런 일은 다시없을 거야! 우리 집에, 2주간이나, 우리 아들로 와 있는 거.”
이래저래 고통과 고역이었지만 선물과 같은 시간이었다. 바이러스 검체 검사를 하고 돌아온 날 저녁에 캔 맥주를 들고 아들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사한 아파트에 대해서, 회사 상황과 출장 건에 대해서, 손자와 며느리에 대해서, 당장 닥쳐올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 두런 도란거리다 밤이 깊어갔다. 내가 마무리를 지었다.
아들아! 살아보니까 사람그릇 크기가 곧 능력의 크기더라. 품어 안아야 한다.
기본적인 가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invaluable) 가치, 그래서 누구도 돈으로 계산하려들지 않는 가치를 수호해라.
돈 처발라가며 자식교육 시키려 하지 마라.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아이들은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라.
그리고 아들아! 정확히 15일간 우리 아들로 있어줘서 좋았다. 수고했다.
녀석은 4월 3일 오전 10시 경에 ‘이상 없음’을 문자로 전송받고 저희 집으로 돌아갔다. 예의 “며느리의 남편”이 된 것이다.
2020. 4. 8.
장 라우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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