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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묵상]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사랑받는 삶, 영광의 전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1,636회 작성일Date 23-08-05 19:4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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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날개다

    재작년에 귀천하신 문인수(요아킴) 시인은 ‘이것이 날개다’라는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시는 한 뇌성마비 중증 지체 장애인의 빈소를 묘사합니다. 시의 주인공 마흔두 살 라정식씨의 빈소를 지키는 이는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친구 여남은 명 뿐인데, 그 친구들 중에 한분이 고인을 부러워합니다. 힘겹게 살아온 날을 끝내고 장애의 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지요.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문인수 ‘이것이 날개다’ 중에서)

    이렇게 육중한 삶의 무게를 견디는 분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죽음마저 해방으로 느껴질 만큼 가혹한 조건 속에 사는 분들 앞에서, 별 것 아닌 일로 투덜대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되지요.



    자기 관리와 계발을 통한 완성

    하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음을 안다고 해서, 내 삶의 어려움과 부족함이 저절로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불만과 아쉬움이 있어서, 자기 부족함을 채우고 더 나은 내일을 맞고자 애씁니다.

    여기에 더해서 현대의 소비문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끝없이 자신을 관리하고 계발해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라고 등을 떠밉니다. 쉼 없이 전진하라는 돌격의 구호가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귓전을 울리는 시대입니다. 또 그렇게 스스로를 관리하고 계발하기 위해서 애쓰는 만큼, 남들에게도 요구가 많아지지요. 누군가 괴롭다고 하소연할 때,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위로하는 대신, 더 노력하라, 누군들 현재의 위치를 거저 얻은 줄 아느냐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심리 말씀입니다.

    하지만 행여 흠잡을 데 없으리만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이 ‘완전’에 대한 강박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빈 구멍 하나를 메우면 또 다른 허점이 보이니까요. 그러니 “이번 생은 망했어”를 선언하고 손 놓는 이들도 늘어갑니다.



    미리 보는 완성의 날

    이렇듯 끊임없이 ‘변모’해서 ‘완성’되기를 요구하는 시대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고 수난의 길을 가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영광을 미리 맛보고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언뜻 보기에, 언젠가 좋은 날이 올 테니 힘든 오늘을 잘 견디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과연 오늘 말씀들도 궁극적인 영광 안에 계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첫째 독서는 마지막 완성의 때에 드러나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다니 7,9) 그분께는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다니 7,14) 그러기에 화답송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을 찬양하고, 제2독서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신”(2베드 1,17) 그분을 증언합니다.



    완성의 궁극적인 의미

    복음도 마지막 날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곳은 ‘높은 산’(마태 17,1)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주님의 산’(이사 2,2-3 참조), 다니엘 예언서가 ‘거룩한 산 위의 예루살렘 성’(다니 9,16)을 말한 바 있습니다. ‘높은 산’이 어디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마태오복음서가 묘사하는 곳이 종말론적 완성의 공간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거룩한 곳에서 예수님은 예언대로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모세와 엘리야는 유대 전통에서 승천하신 분으로 여깁니다. 예수께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당신이 하느님께서 맺으신 구원 계약의 완성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완성이 빛나는 구름 속에서 울려 퍼진 말씀으로 화룡점정을 이룬다는 점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곧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할 때 들린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가르침과 치유와 기적으로 업적을 세우시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미 당신의 사랑받는 아들로 선언하셨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시듯이, 인간의 완성은 그가 무슨 능력과 모습을 가졌느냐,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완성은 하느님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

    어쩌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근본적인 욕구, 즉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받고 인정받으며 존중받는 것, 이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받음’의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영광의 전조가 있다면, 그것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체험하는 순간들일 것입니다. 막연히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며 오늘의 고통을 견디고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통해서 영광의 날을 미리 맛보고, 그 사랑의 힘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의 고통과 남의 고통 앞에서 불가능한 조건을 채우도록 노력하라며 덧없는 희망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조건을 채우면 행복하게 될 테니, 참고 견디며 노력하라고 말하기 전에 복음의 증인이 해야 할 말은 이것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듯,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가톨릭신문 2023-07-25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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