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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만찬’이 ‘가족의 만찬’에서도 재현되길…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91. 식구(食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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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602회 작성일Date 24-10-3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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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편식을 먹더라도 하루에 한 끼쯤은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으면 어떨까. 주님의 만찬이 가족의 만찬에서도 재현돼야 한다. OSV

    가족이 다 같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서로가 분주한 일상 속에서 굳이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 우리는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닌데 때가 되면 하나둘 들어와 함께 밥을 먹었다. 자칫 시간을 놓쳐 어둑어둑할 때까지 놀고 있으면 여지없이 어머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은아~ 밥 먹어! 늦으면 밥 없다!” 어머니는 마치 식구의 끼니를 챙기려고 이 땅에 태어난 굳센 여전사와도 같았다. 아무리 아파도 새벽이면 일어나 밥을 했고, 아무리 바빠도 저녁이면 여지없이 돌아와 또 밥을 했다. 그야말로 우리 가족은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 식구(食口)였다.

    요리하는 일은 참 힘겹고 버거운 노동이다. 집밥이 있는 삶, 환영하지만 그러기엔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겐 너무도 가혹하다고 한다. ‘노동’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어머니의 ‘집밥’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만들어낸 폭력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집밥은 잊으란다. 간편식이 시간의 효율을 위한 ‘시성비’나 ‘가성비’ 차원에서 이득이니 집밥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님, 집밥은 옛말이에요. 오히려 간편식이 맛도 좋고 가성비도 좋아요.” “볶음밥·육개장·갈비탕·찌개? 없는 게 없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정말 맛있다니까요” 하면서 간편식 전문업체 사이트 주소까지 보내준다. 그렇다. 주변을 돌아보니 집밥을 먹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매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에너지를 얻는 차원을 넘어 함께 먹는 구성원들과 정신을 나누고 몸을 돌보는 사랑의 리추얼(ritual, 의식)이다. 정서적 유대와 심리적·영적 교감을 나누는 의식 행위다. 누군가의 정성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밥이라면 그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는 내 몸이고 내 피다.” 미사는 주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초대된 식탁에서의 거룩한 리추얼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도 작은 리추얼이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요리라면 부모의 몸과 피를 먹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주님의 만찬과 가족의 만찬은 모두 사랑과 헌신이라는 의미를 담은 리추얼이다.

    헌신(devotion)이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종교적 행위이며 자신의 삶을 바친다(dedicate)는 뜻이다. ‘간편식’은 정성과 헌신이라는 상징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속도와 가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디지털 세상에는 상징의 깊이를 이해할 여유도 없다. 디지털 기호가 넘치면서 머물러 시간을 내어주고 땀을 흘리는 헌신의 상징성조차 필요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 되어 습관적으로 배고픔을 즉각 해결하기 위해 혹은 쾌감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 반복적인 행위는 루틴이다. 루틴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질서와 규율에 따라 반복하는 자동화된 습관이다. 머물고 성찰하기보다는 행위 자체에 그 의미가 있다.

    하지만 리추얼은 존재의 깊은 층위를 드러낸다. 리추얼은 눈을 뜨고 성호를 긋고 기도하거나 깨어있는 의식으로 집중하고 머물며 깊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리추얼도 아무 의식 없이 무의미하게 반복하면 루틴이 된다. 리추얼이 상징적 의미를 통한 정신과 영혼의 활동이라면, 루틴은 무의식적으로 습관이 된 행동이나 혹은 시간과 경제적 효율성을 목표로 하는 습관일 수도 있겠다.

    사랑과 희생, 정성과 헌신의 상징성을 담은 ‘음식’은 시간이 지나도 정신과 영혼에 새겨져 있어 기억하고 추억한다.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을 마주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 올라오는 이유다. 간편식이나 가공된 식품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처럼 맛있고 흥분된 감정도 음식과 함께 소비되면서 쉽게 잊힌다. 희생과 헌신의 상징성이 희미해지면서 목적에 의해 먹고 즐기다가 덧없는 불안을 끌어안는 세상이다. 가족의 식탁에서 존재와 본질적 관계를 맺는 사랑의 리추얼이 새롭게 시작되었으면 한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가 사는 세상, 피로사회라고 하지요? 바쁘고 분주한 일상에서 ‘요리할 에너지도 시간도 없어 자녀에게 배달음식이나 간편식을 먹일 수밖에 없다’며 하소연하는 젊은 부부가 많습니다. 설사 요리를 한다 해도 이미 간편식이나 인스턴트에 익숙한 자녀에게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일이 어렵다고 합니다. 세상은 변해가고 이런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데요.

    그렇다면 비록 간편식을 먹더라도 하루에 한 끼쯤은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으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왕이면 일회용 그릇이 아닌 정성껏 예쁜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은요?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요리 한두 가지 정도 곁들이는 것은 또 어떨까요? 시대적 변화에 의해 부모의 헌신과 희생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의 리추얼’은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만찬이 가족의 만찬에서도 재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녀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눈을 맞추고 대화하고 경청하는 진짜 ‘식구(食口)’가 되는 거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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