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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Ⅱ’ 특집] 코린토 1서 – 분열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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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2,745회 작성일Date 20-09-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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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성경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두 개의 서간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편의상 첫째 서간을 ‘코린토 1서’, 둘째 서간을 ‘코린토 2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두 번이 아니라 적어도 네 번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시기적으로 코린토 1서를 앞서는 어떤 편지가 있었고(1코린 5,9-11 참조), 마찬가지로 코린토 2서를 앞서는 또 다른 편지가 있었음(2코린 2,4 참조)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서간은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여러 통의 편지를 어느 한 공동체와 끊임없이 주고받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그 공동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코린토는 로마 제국의 속주 아카이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또 켕크레애와 레카이온이라는 두 항구를 양쪽으로 끼고 있어서 상업적으로 굉장한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에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 그리고 종교가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유다인들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째 선교 여행(기원후 50-52년경) 중 코린토를 처음 방문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1년 반 동안 머무르며 선교 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코린토 공동체가 설립된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사도 18,1-17 참조). 코린토 1서는 바오로가 세 번째 선교 여행 중 에페소에 머무르던 시기에 코린토 교회에 생긴 문제들에 답을 주고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54-57년경).

     

    코린토 1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1-6장)는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에게 전한(1,11) 공동체의 문제들을 다루고, 후반부(7-16장)는 코린토 교회가 편지를 통해 바오로에게 직접 문의한 사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코린토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생긴 여러 갈등으로 인해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 구성원들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내세워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1,12) 하면서 서로 갈라져 당파를 형성하고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1-4장). 그 외에도 코린토 사회에 만연했던 성적 문란함(불륜)에 얽힌 문제(5-6장), 이교인들의 법정에서 교우끼리 송사하는 문제(6장),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8-10장), 주님의 만찬 때 가난한 이들이 느끼는 소외감(11,17-34), 영적 은사의 다양성에서 비롯한 문제(12-14장), 그리고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사상(영·육의 분리)에서 비롯한 ‘부활 논쟁’에 이르기까지(15장), 코린토 공동체는 그야말로 ‘분열’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에서 자신이 세운 공동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상세히 다루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분열’이 아닌 ‘일치’의 길로 나아가도록 안내합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바오로 사도가 제시한 기본 원리는 ‘십자가의 어리석음’, 즉 십자가의 복음(1,18-31)입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자들,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이들, 심지어 자신이 누구에게(바오로, 아폴로, 케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까지도 내세우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23-25).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택하신 하느님의 지혜(1,27) 앞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힘이나 권세나 지혜를 자랑할 수 없기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오로지 십자가의 복음에 의지하며 성령이 거처하는 거룩한 공동체(3,16-17)와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시 세상의 논리 또는 지혜를 내세우며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에 있어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하느님께서 내세울 것 없는 우리를 부르신 그 동기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28-29).

     

    [2020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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