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오늘을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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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3,130회 작성일Date 20-09-27 16:14본문
[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오늘을 살기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코로나19를 처음 맞은 우리의 마음은 이러했을 것이다. 2020년도 반이 지났다. 여름이 한창인데도 여전한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위축되고, 긴장과 경계의 시간이 쌓이면서 정신적 · 육체적 피로감은 높아만 간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불안 지수도 상승하는 중이다.
내어 드리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중심지인 성전에 가신다(마르 11장). 성전을 배경으로 한 그의 가르침과 비판은 유다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처럼 만든 당시 유다교의 잘못된 체계와 관행에 분노하신다(15-17절).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으며 그분과 논쟁을 벌이고,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지적하신다(11,18-12,40).
한동안 이어진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에 뒤이어 한 여인이 등장한다(12,41-44).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과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다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43-44절).
이때 ‘생활비’로 옮긴 그리스어의 첫 번째 의미는 ‘생명’(bios)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그 순간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을 모두 봉헌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과부는 ‘수숙혼’(자식 없이 남편이 죽으면 집안의 이름이 끊이지 않도록 그 형제와 혼인하는 제도)에 따라 다시 남편을 맞아들이거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대다수는 자식 또는 자선에 의존해 살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부의 행동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본문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새로운 견해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칭찬이 아니라 탄식의 의미로 읽는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에게 그렇게 하도록 당시 체계를 단죄하신다는 해석이다. 바로 앞에 율법학자들의 태도, 특히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행위’(40절)를 비판하시고서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의 헌금을 지지하며 칭찬하셨다고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전통적인 해석은 이 본문이 가난한 과부의 행동을 앞의 율법학자들의 모습(38-40절)과 대조시키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긍정적인 모델을 제시한다고 이해한다. 강조점은 과부의 행동을 칭찬한 예수님의 선언(44절)에 있다. 이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비판 다음에 놓였다는 사실보다는 그 내용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태도이다.
두 가지 해석 모두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이 구절을 과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의 행동은 온전히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드린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온전한 봉헌의 모습은 과부 이야기 조금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에게서도 볼 수 있다(14,3-9).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마태 26,6-13; 루카 7,36-50; 요한 12,1-8). 마르코와 마태오의 이야기는 거의 일치하고 요한 복음의 내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이야기 배경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이고, 향유를 부은 여자가 마리아인 점 등), 다수의 학자는 마르코, 마태오, 요한의 이야기를 같은 전승의 변형 형태로 이해한다.
한편 루카의 이야기는 마르코와 유사하면서도(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의 이름이 시몬, 향유가 든 옥합이라는 표현, 여자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변호 등) 다른 점이 많다(이야기 배경이 베타니아가 아니라 갈릴래아 지역이고, 시몬은 나병 환자가 아니라 바리사이, 예수님의 머리가 아니라 발에 향유를 붓고, 여자는 죄인이라고 표현되며, 이 점에 초점을 두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 등).
따라서 마르코, 마태오, 요한의 이야기와 루카의 이야기는 두 개의 독립 전승에서 비롯한다고 추정되며, 구두 전승 기간에 두 전송이 어느 정도 동화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마르 14,3).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몇 사람이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4-5절). 이야기의 시기적 배경인 파스카 축제일은 유다인들이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날이었으므로, 여기서 사람들이 지적한 것은 자선에 대한 관심이었을 법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7-8절).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언제든지 해 줄 수 있다’와 ‘늘 곁에 있지 않다’가 대조되며 ‘시간’이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행위를, 당신의 장례를 위하여 미리 향유를 바른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여자도 앞으로 예수님께 일어날 사건을 내다보고 그렇게 행동했을까?
머리에 향유를 바르는 것은 축하나 친교의 표현이었고(시편 23,5; 아모 6,6), 엄청난 재화(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상응하는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여자의 특별한 인식을 암시한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고 하니 삼백 데나리온은 일 년 치 임금과 맞먹는 금액이다.
용기와 결단
두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자가 헌금을 넣은 과부보다 훨씬 부유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이름도 출신 배경도 알려지지 않는다. 향유를 부은 여자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유다교 사회에서 여자가 그리 큰 재산을 처분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여자의 용기와 결단을 보여 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귀한 것, 또는 자신이 소유한 전부를 하느님께, 예수님께 드렸다. 그러한 봉헌이 앞날에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에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순간에 충실하였다.
오늘을 살기
오늘날 우리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기계와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에 더하여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내일을 준비하느라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잊고 있지는 않은지? 내일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오늘 할 일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주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오늘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은 두 여자가 요즘 들어 더욱 존경스럽고, 그들의 용기와 결단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진다.
* 강선남 헬레나 -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신약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경의 인물들」, 「교부들의 성경 주해, 탈출기-신명기」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강선남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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