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의 울타리에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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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2,817회 작성일Date 20-03-21 09:47본문
[봉쇄의 울타리에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봉쇄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많았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과 침묵 기도의 신비스러움, 다양한 수업과 영적 독서를 들으며 침묵 중에 하는 식사뿐만 아니라 공놀이, 춤, 노래, 연극 등의 활기찬 오락 시간 등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안에 넘쳐흐르는 주님 사랑
일상의 사소한 삶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 한 가지를 꼽자면 세탁한 물을 다 버리지 않고 받아 모으는 것이었지요. 처음 세탁할 때 쓴 가장 더러운 물만 버리고 그다음 헹굼 물은 큰 다라이, 작은 다라이 할 것 없이 통이란 통은 다 동원하여 담아냅니다. 이 물을 어디에다 쓰려고 그러는 걸까요? 걸레를 빨거나, 바닥 청소, 화장실 물 내릴 때 등 이용할 곳이 아주 많답니다.
가끔 초콜릿 선물이 들어오면 내용물도 기쁘지만, 초콜릿을 싼 은박, 금박의 포장지가 더 반갑습니다. 최대한 손상이 가지 않게 개봉한 뒤 잘 펼쳐서 모아 둡니다. 그리고 성탄 시기가 다가오면 은별, 금별을 만들 때 성탄 장식으로 이용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수도원 안에는 거울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어떤 방에도, 또 화장실, 세면실 등 그 어느 곳에도 거울이 없습니다. 돈을 아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을 관상하라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청빈과 봉헌의 표지라 할 수 있는 수도복은 단 두 벌만 지닙니다. 수도원에서의 가난과 청빈은 단지 절약 차원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답니다. 무엇보다도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2코린 8,9) 하신 예수님을 닮고 그런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이 우리 안에 넘쳐흐르는 주님에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이랍니다.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자녀를 둔 엄마를 상상해 봅시다. 어느 엄마가 이런 아이를 내버려 두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꾸미고 취미 생활을 하는 데에 관심을 둘 수 있을까요? 그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하며 어떻게든 아이의 건강을 되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겠지요. 도움의 손길이 시급한 세상의 무수히 많은 고통받는 이의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봉쇄 수녀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이가 우리의 부모요 형제자매이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극기, 희생은 힘들고 고된 것이 아니라 아픈 아이 곁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엄마의 애타는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콜로 1,18)로 하여 우리는 그분의 각 지체인 것이지요. 영적 지도 신부님은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어요.
“심장이 아프면 입은 쓴 약을 먹는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만일 입이 ‘나는 멀쩡한데 뭐하러 약을 먹는담? 그리고 이렇게 쓴 약은 먹기 싫어.’라며 삼키기를 거부한다면 심장은 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발이 부러졌으면 어깨와 팔, 손 등이 목발을 짚는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렇게 몸의 각 지체들은 약한 지체의 고통을 함께 떠안으며 도와야 나을 수 있지요. 이렇게 봉쇄 수녀들은 세상의 아픈 지체들을 위해 가난과 그에 따르는 불편함, 고통을 기쁘게 떠안으며 그리스도의 가난과 희생에 하나 되어 날마다 찬미의 제사를 바칩니다.
여기서 잠깐 저의 회개 체험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릴 적 세례와 첫영성체도 받고 나름 열심히 성당에 다녔지만, 대학교에 들어간 뒤로 8년 가까이 냉담하였지요. 수도자가 되기 전 세상의 모든 이들처럼 열심히 명예와 성공을 따르며 살았답니다. 이미 좋은 직장이 있었지만, 더 큰 야심을 품고 고시촌에 들어갔지요. 몇 해 동안 그렇게 고시 시험을 준비하며 보내는데 시험일이 가까워진 어느 날 갑자기 성당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알아보니 고시촌에서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성당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너무 오랜만에 참여하는 미사인 데다가 처음 와 보는 성당이라 조금은 어색한 기분으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지요.
미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심코 주보를 읽었는데 그날 복음인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해설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가라지를 뽑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밀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음을 읽는 순간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정말 계신다면 왜 이 세상에 수없는 악이 판을 치는지에 대해 의심과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심과 선하심, 또 그분의 더 큰 계획을 깨닫는 순간 정말 하느님께서는 나의 좁은 생각과 틀 너머 저 높이 계심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조금 열린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미사 내내 미사 전례와 성경 말씀, 성체성사 등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으로 저를 압도해 왔습니다. 너무나 강렬한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미사 내내 눈물만 펑펑 쏟았습니다.
새 삶을 주신 예수님
그날 이후 신앙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보였습니다. 이제껏 나의 삶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세상이 밀어붙이는 대로 산 ‘가짜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수도 성소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진리를 찾던 가운데 ‘참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 말고는 참된 삶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진리와 사랑에 빠져 시작된 수도 생활은 모든 것을 버렸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삶이지만, 오직 하느님으로 만족하기에 무한히 풍요로운 삶, 참자유와 행복으로 모든 이를 위해 내어 주는 사랑에 빠진 삶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봉쇄 수녀가 되어 누군가를 위해, 온 세상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면서 그때 그날 갑자기 성당에 가고 싶어졌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극기하며 기도를 바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부모요 형제자매, 자녀이며 나의 지체이자 한 몸인 「경향잡지」 독자 여러분, 비록 우리가 서로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늘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위로와 희망을 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저희 말고도 충실한 신앙의 삶으로 드러나지 않게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이가 많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삶을 살아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거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랑의 힘이 있음을 믿으며, 당신의 가난으로 세상을 부유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 이 연약하고 가난한 표징 안에 충만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 속에 깊이 잠기는 성탄 시기를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 한 해 동안 ‘봉쇄의 울타리에서’를 써 주신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신기선 부활의 마리아 베리타스(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
가톨릭 굿뉴스 자료실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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