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통곡의 벽(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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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동성당 댓글 0건 조회Hit 2,484회 작성일Date 19-11-11 16:17본문
[성경의 세계] 통곡의 벽
통곡의 벽은 유대인 최고성지다. 늘 붐빈다. 아이를 낳으면 할례의식을 치르고 성인식은 반드시 통곡의 벽 앞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13살이 되면 평생 율법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성인식이다. 이렇듯 통곡의 벽은 그들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이며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은 기원전 586년 파괴된다. 이후 재건된 성전이 쯔루빠벨 제2성전이다. 헤롯 대왕은 기원전 20년 보수공사를 감행했다. 모리야 산을 깎아 500m 길이의 광장을 만들고 성전개축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기 70년 로마는 유대 독립군을 진압하면서 성전을 또다시 파괴했다. 핵심 요원이었던 열혈당원이 성전 안에서 저항했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 표현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겨지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헐어버렸다(마태 23,37-39). 성전모습은 사라졌고 모리야 산을 감싼 바깥벽만 남게 되었다. 그중 서쪽 벽이 통곡의 벽이다. 이곳에선 옛날 지성소가 있던 곳이 보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서쪽성벽 길이는 대략 500m다. 사진에서 접하는 통곡의 벽 길이는 50m 정도, 높이는 18m 가량 된다. 나머지는 땅속에 매립되어 있다.
서기 132년 유대인은 두 번째로 로마에 반기를 든다. 2차 독립전쟁이다. 당시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의 저항에 진저리를 쳤다. 강경 진압을 하자마자 곧바로 유대 지역에서 내쫓았다. 출입하다 발각되면 죽였다. 그리곤 필리스틴인 땅이라 선언했다. 팔레스티나의 유래다. 유대인은 터전을 잃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죽은 뒤에야 성전이 파괴된 8월 29일(아브달 9일) 당일만 예루살렘 출입이 허용되었다. 그날 신심 깊은 유대인들은 서쪽 벽을 붙들고 통곡했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어진 이유다. 성벽은 고고학으로 증명되었고 기원전 2세기 이전 축조물로 알려졌다. 윗부분은 후대에 덧쌓아진 것이라 한다. 현재도 유대인은 이곳을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이곳을 방문했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관할권을 놓고 오랫동안 투쟁했다. 20세기 초까지 요르단 영토였기에 유대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1967년 일어난 6일 전쟁 뒤 이스라엘은 이곳을 점령한 뒤 돌려주지 않고 있다. 유대인은 통곡의 벽에 들어가려면 모자를 쓴다. 이방인도 ‘키파’라는 정수리 모자를 써야 한다. 입구에서 빌려주고 있다.
[2018년 11월 25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가톨릭마산 8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신안동본당 주임)]-카톨릭 굿뉴스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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