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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1 - 서론: 완전한 삶에 대한 열망(201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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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목동성당 댓글 0건 조회Hit 3,266회 작성일Date 19-11-11 15:59

    본문

    십계명에 관한 교리 (1) 서론 : 완전한 삶에 대한 열망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십계명에 관한 교리 교육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름이 안토니오인 사람이 있습니까? (축일을 맞은) 모든 “안토니오”에게 (축하) 박수를 보냅니다. 오늘은 십계명에 대한 주제로 교리 교육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시다.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십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소개하기 위해 방금 들은 성경 말씀에서 단서를 얻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한 젊은이와의 만남입니다. 그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마르 10, 17-21 참조). 그 질문 안에는 모든 존재의, 우리 모두의 도전이 있습니다. 곧, 완전하고 무한한 삶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진정한 삶을 살고, 고귀한 존재로 살기를, (……)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살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그러한 의지를) 파괴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충동, 곧 살기 위한 충동이 위험하기 때문에 끄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당부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최악의 적은 심각하고 극적일 수도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큰 위험은 안주하고자 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온유함도 겸손도 아닙니다. 우유부단함이며 소심함(pusillanimità) 입니다. 우유부단한 젊은이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머물러있으며, 성장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유부단함 혹은 소심함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의 특징입니다. “아니오, 저는 원래 이렇습니다, (…)” 이러한 젊은이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온유함과 강직함이 필요합니다. 우유부단함이나 소심함은 필요 없습니다. 청년이었던 피에르 조르조 프라사티(Pier Giorgio Frassati) 복자는, 대충 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대충 살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역동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위해 건전한 고뇌의 은총을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해야 합니다. 집에서, 여러분의 집에서, 모든 가정에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젊은 자녀를 볼 때, 부모는 “애가 병들었구나, 뭔가 잘못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의사에게 데려 가기도 합니다. 젊은이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고민하며, 건전한 고뇌를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움과 특징이 없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봅시다. 만약 젊은이들이 진정한 삶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인류는 조용하고 고뇌하지 않는 젊은이들과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들은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의 질문은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삶과 풍요로운 삶, 그리고 행복은 어떻게 찾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19 절)라고 대답하시며 십계명의 일부를 인용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확실한 것으로 인도하길 원하시는 교육 과정입니다. 실제로, 그 젊은이의 질문에서 (우리는) 이미 그가 완전한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더 찾아 헤매고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이해해야 합니까?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20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젊음에서 성숙으로 나아갑니까?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상대화되고, “부족한 것”을 알게 될 때 어른이 됩니다(21절 참조). 이 젊은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지붕”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곧 한계를 넘지 못한 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정말로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세기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인간이 자주 배척되었다는 진실이 있습니다. 인간 한계의 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주 예수님께서는 완성을 선물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때문에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업적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삶을(이러한 삶은 완전한 삶이 아니기에)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도약의 문턱에 도달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엄청나고 놀라운 마지막 권고 안에는, 가난에 대한 제안이 아니라 진정한 부에 대한 제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 절).

    원본(진짜)과 사본(가짜)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누가 사본을 선택하겠습니까? 여기에 도전이 있습니다. 삶의 사본이 아닌 원본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리자를 제공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삶과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부를 제공하십니다. 젊은이들이 우리가 원본을 선택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가 어정쩡한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을 본다면, 과연 그들이 우리를 신앙 안에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정쩡한 그리스도인을 보는 것은 보기 싫습니다. 그들을 “난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자라지만 그 후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작고 닫힌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보기 싫습니다. “넘어서”와 “더욱 더”, 그리고 조금 더 성장하는 것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사람의 사례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이냐시오 성인은 “마지스”(magis, ‘더 나은 것’, ‘더욱 더’)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곧, “졸음을 흔들어 주는 행동의 불꽃이며 열광”입니다.

    부족한 것의 길은 있는 것을 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에서 발전하기 위해 현실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특별함으로 열기 위해서 평범함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젊음의 환상에서 하늘에 있는 보물로 이동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 가면서, 이 교리 교육 중에 모세의 십계명 판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다룰 것입니다. 이 각각의 오래되고 현명한 계명들 안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열어 주신 문을 찾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자신의 삶과 하느님 자녀들의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바티칸 뉴스, 2018년 6월 13일] 

    카톨릭 굿뉴스 자료실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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