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4 - 사랑하기 위해서는(201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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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동성당 댓글 0건 조회Hit 3,295회 작성일Date 19-11-11 16:01본문
십계명에 관한 교리 (4)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여름 휴가 동안 중단됐다가 오늘부터 다시 시작된 일반알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주제인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춘 교리교육을 진행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대단히 중요하고 현실적인 주제인 우상숭배라는 주제에 머물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명령은 우상이나 그 어떤 종류의 실재를 본뜬 모상을 만드는 걸 금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우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한 가지 경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향은 신앙인이건 무신론자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나의 참 하느님인지에 대해 물을 수 있습니다. 한 분이시며 세 위격이신, 사랑이신 분인가? 아니면 나의 모습, 혹시라도 교회 안에서의 나의 개인적 성공을 뜻하는가? “우상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신앙에 끊임없는 유혹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3항).
실존적 차원에서 “신”이란 무엇일까요? 자기 삶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서 행하고 생각하는 것이 거기에 의존합니다. 우상숭배는 명색이 그리스도교 가정이지만 실제로는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들에 집중해 있는 가정 안에서 자라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상들의 “수퍼마켓”을 제공합니다. 이 우상들은 물건, 영상, 관념, 역할들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의 어느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미사 후에 저는 1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주례해야 했습니다. 저는 걸어서 그 본당에 갔습니다.
가는 도중 어떤 멋진 공원을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공원에는 50개가 넘는 작은 탁자가 각각 의자 두 개와 함께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한 사람씩 서로 마주보고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타로(tarocchi)’라는 카드점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상에게 “기도하러” 거기 가는 것이었습니다. 미래를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그 사람들은 미래를 알기 위해 카드점을 보려고 거기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우상숭배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이나 미래를 알기 위해 카드점을 보러 가셨는지요? 예컨대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이나 미래를 알기 위해, 주님께 기도하는 대신, 손금을 보러 가셨는지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다는 것, 다른 것들은 우상이며, 쓸모 없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어떻게 발전합니까? 십계명은 그 단계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는 (…)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4-5).
“우상”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보다(vedere)”라는 동사에서 비롯됐습니다. 우상은 고착이나 강박이 되기 쉬운 “보는 것”입니다. 우상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사물이나 어떤 계획에 투사(proiezione)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광고는 이러한 역동성을 이용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나의 본질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그 자동차, 그 스마트폰 등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 물건을 소유하거나, 그 계획을 실현한다는 생각이나, 그 지위에 도달한다는 생각은, 행복해지기 위한 놀라운 길인 것처럼 보이고, 하늘에 이르기 위한 탑(창세 11,1-9 참조)으로 보이며, 모든 것이 그 목표를 위한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갑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지 못한다”(탈출 20,5). 우상들은 경신례를, 곧 예식을 요구합니다. 우상들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우상들에게 인간을 희생제물로 바치곤 했습니다만,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출세를 위해 자녀들을 희생시키는 것이지요. 자녀들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자녀를 낳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또한 아름다움도 인간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지요! 어떤 사람들, 어떤 여성들은 화장을 하기 위해 얼마나 소비를 합니까? 이 역시 우상숭배입니다. 화장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여신이 되고자 하지 말고요. 아름다움은 인간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명성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과 진정성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우상들을 피를 요구합니다. 돈은 생명을 빼앗고 쾌락은 고독으로 이끕니다. 경제구조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인간생명을 희생시킵니다. 일자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기업, 그 회사의 경영진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흔히 사람들을 쫓아내기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우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행하고 말하면서 위선을 살아가는 겁니다. 자신이 인정받는 성공이라는 우상이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젊은이들은 파괴적인 모델들의 손에 내쳐지게 됩니다.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약도 우상입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 마약이라는 우상을 경배하면서 건강을 잃고 심지어 생명까지 파멸시키는지요.
이제 세 번째 가장 비극적인 단계에 도달합니다. “너는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5)고 말씀하십니다. 우상들은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행복을 약속하지만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자기 파괴적인 소용돌이 안에 갇힌 채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결과를 기다리면서, 그 물건이나 그 ‘보는 것’을 위해 다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상들은 생명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참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생명을 주십니다. 선물로 주십니다. 참 하느님께서는 우리 성공을 반영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참 하느님은 자녀들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주십니다. 우상들은 미래의 가설들을 투영하면서 현재를 무시하도록 만듭니다. 참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나날의 현실 안에서, 구체적인 것 안에서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미래를 향해 걸어가면서 말입니다. 참 하느님의 구체성은 우상들의 유동성에 맞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드립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우상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상인지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것은 은총의 시작이며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상숭배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 절대적이고 손댈 수 없는 것이 되면, 그것은 배우자보다, 자식보다, 우정보다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생각에 대한 집착은 사랑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게 합니다.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간직하십시오. 우상은 우리에게서 사랑을 빼앗아가고, 우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보지 못하도록 눈멀게 하며,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든 우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그 우상을 꺼내서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십시오!
[바티칸 뉴스, 2018년 8월 1일]
카톨릭 굿뉴스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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