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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5 - 우상숭배: 약함의 문으로 하느님(2018/08/30)

    페이지 정보

    작성자 목동성당 댓글 0건 조회Hit 3,433회 작성일Date 19-11-11 16:02

    본문

    십계명에 관한 교리 (5) 우상숭배


    “약함의 문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들어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상숭배를 주제로 한 일반알현에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께 자신을 열기 위한 조건이자 우리 마음의 우상들을 거부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주에 나눈 이야기, 곧 우상숭배라는 주제를 심화하면서 계속 십계명을 묵상해봅시다. 그 주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연 우상 중의 우상인 금송아지에서 실마리를 끌어내 봅시다. 이에 관해서는 탈출기가 언급하고 있습니다(탈출 32,1-8 참조). 방금 우리가 들은 그 구절이지요. 이 이야기에는 구체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산에 오른 모세를 기다린다는 사막이 그것입니다.

     

    사막이란 무엇입니까? 불확실성과 불안정이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도 없고, 음식도 없고, 쉴 곳도 없습니다. 사막은 상태가 불확실하며 침해 받지 않을 보장이 없는 인간 삶의 표상입니다. 이 불안정이 인간 안에 일차적인 걱정을 낳습니다. 그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걱정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마태 6,31) 이것들은 일차적 걱정들입니다. 사막은 바로 이러한 걱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서 우상숭배의 도화선이 되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다. “모세는 산에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고”(탈출 32,1) 그곳에서 40일을 머무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견딜 수 없게 됐습니다. ‘모세’라고 하는 중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지도자, 우두머리, 확실한 안내자인 모세가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러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방향을 잡기 위해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했습니다. 백성들이 빠진 함정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탈출 32,1) “우리에게 우두머리를 만들어 주시오. 우리에게 지도자를 만들어 주시오.” 인간 본성은 불확실성, 곧 사막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든” 종교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나 보이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맞춤형 신을 하나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상 앞에서는 우리의 안전을 포기하라는 요청을 받을 위험이 없습니다.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기’(시편 115,5) 때문입니다. 우상이란 우리 자신을 현실의 중심에 두고 우리 손이 만든 작품을 숭배하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 13항).

     

    아론은 사람들의 요구에 반대할 줄 모르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줍니다. 송아지는 고대 근동에서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번식과 풍요를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활력과 힘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졌기에 부(富)와 성공, 권력과 돈의 상징입니다. 이것들은 커다란 우상들입니다. 성공, 권력, 돈 말입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있는 유혹이지요! 자, 그렇다면 금송아지는 무엇일까요? 자유라는 환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노예화하는 모든 욕망의 상징입니다. 우상은 항상 사람을 노예로 만드니까요. 우상은 매혹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에게 가는 겁니다. (예컨대) 이것은 작은 새를 바라보는 뱀이 보여주는 매혹입니다. 작은 새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뱀은 그 새를 잡아 먹습니다. 아론은 반대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우리의 안전을 그분께 두지 못하며, 우리 마음의 욕구에 그분께서 참된 깊이를 부여하시도록 하지 못하는 데서 (우상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분께 (나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은 나약함과 불확실성과 불안정까지도 견딜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느님에게 기준을 두는 것은 약함 안에서도, 불확실성 안에서도, 불안정한 가운데서도 우리를 강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최우선순위에 놓지 않고서는 쉽게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되며, 안심시켜 주는 시시한 것들로 만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항상 성경에서 읽는 유혹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하느님께로 데려가는 것에는 많은 작업들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권능과 사랑의 표징들로 백성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위대한 일은 백성들의 마음에서 이집트를 빼내는 것이었습니다. 곧, 백성들의 마음에서 우상숭배를 없애는 것이었지요. 아직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우상숭배를 없애기 위해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일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우상숭배의 매혹이라는 ‘그 이집트’를 없애는 것이지요.

     

    부요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수치가 아니라 참으로 강하신 분에게 자신을 열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약함이라는 문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들어오는 셈이지요(2코린 12,10 참조). 사람이 하느님의 부성(父性)을 향해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라는 힘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참 하느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삼는 것에서부터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의 우상들을 거부하게 해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돌립니다(요한 19,37 참조). 그분께서는 약하셨고 멸시당하셨으며 모든 소유를 박탈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 안에서 참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나고, 현혹하는 속임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랑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우리는 바로 하느님이셨던 한 사람의 약함으로, 그분의 상처로 나았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치유는 가난하게 되신 분, 곧 실패를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불안정성을 사랑과 힘으로 채워 주시고자 그것을 밑바닥까지 취하신 분에게서 나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부성애를 드러내시려고 오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나약함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는 자리이고 높은 데서 오는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샘입니다.

     

    [바티칸 뉴스, 2018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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