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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코로나 신앙의 길을 묻다] 다시 듣는 21세기 바벨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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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1,126회 작성일Date 20-07-27 15:58

    본문

    [포스트 코로나 신앙의 길을 묻다] 다시 듣는 21세기 바벨탑 이야기

     

     

    “이럴 줄은 몰랐다.”

     

    ‘코로나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질병관리본부의 말에 절로 나오는 탄식이다. 익숙하던 삶의 방식이 이처럼 한꺼번에 사라진 예가 또 있을까?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맞이한 세상이 그러했을 것 같다. 그때 그들은 새 삶에 잘 적응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탑을 쌓고 성을 만들어 다 함께 모여 살기를 꾀했다(창세 11,4 참조).

     

    우리는 당시 인류가 쌓았다는 바벨탑(창세 11,1-9)에 대해 들으면 높은 탑을 쌓아 신성한 영역까지 침범하려 했던 인간의 야망을 주로 떠올린다. 하지만 바벨탑 이야기가 말하고자 한 바는 따로 있다. 그것은,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어떤 계기로 세상에 흩어지게 되었고, 왜 서로 다른 말을 쓰게 되었는지 원인학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류가 흩어지게 된 결과를 창세기 10장에서 먼저 언급한 뒤 11장에서 그 원인을 역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 안에 암시된 인간의 야망도 다른 데 있다. 하늘까지 닿는 탑 쌓기가 아니라 뛰어난 건축물을 만들어 이름을 남기려 했던 교만의 탑을 쌓고 한곳에 뭉쳐 살면서 흩어지지 않으려 했던 시도이다.

     

    바벨탑 이야기의 배경은 메소포타미아다. 대홍수 뒤 초기 인류가 ‘신아르’ 지방에 세우려 했다는 성읍(창세 11,2)은 옛 바빌론을 풍자한다. 창세기 11장 9절에 ‘바벨’은 ‘혼동’의 뜻으로 풀이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바빌론’을 뜻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을 동경해 높은 곳에 제단을 짓곤 했는데, 그게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산당이다(1사무 9,12-14 참조). 이스라엘은 산이 많아 산당 지을 곳이 많았지만, 메소포타미아는 대부분이 평야라 산당을 짓는 대신 탑을 쌓았다. 높게 쌓은 탑이 일종의 ‘산’처럼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고 여겼다. 바빌론은 당시 그곳 현지어인 아카드어로 ‘바브-일림’이라 일컬어졌는데 ‘신의 문’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늘 신들이 바빌론을 통로 삼아 지상으로 내려온다고 믿은 그들의 신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 가운데 ‘바벨탑’이 상징하는 것은 ‘지구라트(ziggurat)’라 일컫는 대규모의 타워다. 이 타워가 ‘신들의 계단’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으며, 그래서 ‘지구라트’에는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창세 11,4)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고 한다. 결국 ‘하늘까지 닿는 탑’은 우리가 생각해온 바와 달리,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인간의 도전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빌론에서도, 옛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뜻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늘까지 닿는다’는 말은 매우 높은 건물이나 성읍을 묘사할 때 쓰이던 관용 표현이었다.

     

    일례로 신명기 1장 28절을 보자. “그곳 백성은 우리보다 우람하고 키도 크다. 성읍들은 클뿐더러 하늘까지 닿는 요새로 되어 있다. 우리는 또 거기에서 아낙인들까지 보았다.” 여기에 ‘하늘까지 닿는 요새’가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9장 1절에는 “하늘까지 닿는 성벽”이라는 어구도 나온다. 두 경우 다 인간의 교만을 꼬집으려고 쓰인 표현이 아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암시된 인간의 교만은 다른 데 있다. 하나는 이름을 날리려던 시도다(창세 11,4 참조). 바빌론인들은 지구라트를 건축할 때마다 그 건축을 지휘한 임금의 이름을 지구라트 기반에 새겼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탑을 한 번 건축하면 말 그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온 세상에서 번성하라 하신 하느님의 강복(창세 1,28; 9,1)에 인간이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성과 탑을 만들어 흩어지지 않으려 했다(창세 11,4 참조). 이에 하느님이 언어를 뒤섞으시어 인류를 온 세상으로 흩어버리신 것이다(창세 11,7-9 참조).

     

    그렇지만 바벨탑 시대에 일어난 인류의 이런 탈선은 다음과 같이 바로잡히게 되리라고 스바니아 예언자는 예고한다.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섬기게 하리라.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오리라. 그날에는…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에는 …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 그러면…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스바 3,9-11) 정화된 “민족들의 입술”과 “흩어진 이들”이라는 표현에서 스바니야서가 바벨탑 사건을 암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만한 자들이 자신의 행실을 부끄러워하게 될 날에 주님께서 흩어진 인류를 하나로 모으시리라는 메시지다. 창세기에서는 민족들의 언어가 갈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지만, 스바니야서에서는 주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세상 만민이 한 언어를 쓰고 서로 이해하며 한목소리로 주님을 찬미하게 되리라고 예언한다.

     

    이 신탁은 언제 실현되었을까? 이 신탁이 이루어진 첫 단계는 사도행전 2장 1-13절에 서술된다. 오순절,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이다. ‘불꽃 모양의 혀가 각 사람 위에 내려앉자’(3절)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4절). 사람들은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6절). 여기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건 바벨탑 이후에 갈린 언어가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는 암시다.

     

    이천 년이 흐른 지금은 우리가 보편된 교회 안에서 바치는 미사전례를 통해 스바니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현실을, 인류가 하나된 모습을 확인한다. 비록 몸은 저마다 다른 지방에 있지만 전 세계 어디서든 같은 미사를 드림으로써 서로 이해하고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코로나19가 바꾸어놓은 세상 안에서 또다시 노아의 후손들이 될 처지에 놓였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재앙으로 오히려 삶의 터전인 지구는 더 깨끗해졌다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가 바벨탑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까지 닿는 탑 쌓기’는 아니었지만 자연 위에 군림하며 마구 착취를 일삼았던 오만과 첨단기술로 찍어낸 휘황찬란한 건축물과 기계에 이름을 새기려 한 교만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서로가 비록 몸은 예전보다 더 멀어지게 되었지만 한마음 한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뜻을 찾는 몸짓을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다.

     

    * 김명숙 - 성서학자.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과 수도자신학원 등에서 구약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저서로 『에제키엘서』가 있다.

     

    [생활성서, 2020년 7월호, 김명숙]


    가톨릭뉴스 자료실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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