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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묵상] ‘좋은 기다림, 나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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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21회 작성일Date 20-11-13 10:0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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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이렇게 모두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마음을 모으는 거구나…. 코로나19의 종식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라져가는 시간의 뒷모습만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시간의 앞모습을 성실히 맞이할 준비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버스의 앞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듯이….

    오늘 전례의 본문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복음)의 대조를 통해 어떻게 기다려야 제대로 기다리는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줍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행복한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도 누구나 예외없이 경험하는 시간이지만 기다림의 ‘결과’는 분명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주에 선포된, 미리 깨어 준비하는 기다림에 대한 주제가 이번에도 이어집니다. 비유가 전개되는 큰 맥락은 비슷한데, 모든 것을 결정지을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제 그 주인의 도착이 거의 다다랐음을 알립니다. 다만 주인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도착이 구체적으로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 주인을 기다리는 이들 중 몇몇은 확실한 신뢰와 전망 속에 성실히 준비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것, 결국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인이 와서 최종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것 등입니다.


    ■ 착함과 악함

    비유에는 주인과 세 명의 종이 등장하며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깁니다.”(마태 25,14) 이때 “각자의 능력에 따라”(15절)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세 번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가 주어집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19절) 되는데, 두 명의 종들은 “착하고 성실한 종”(21.23절)으로 평가받습니다. 주어진 탈렌트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받은 선물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외적 성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은 종에게나 두 탈렌트를 벌은 종에게나 동일한 평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23절) 주인은 거저 받은 탈렌트에 대한 감사와 성실함이 있었는지의 여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악’하다고 언급한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25절)라며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종을 과연 ‘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유의해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받은 한 탈렌트를 그냥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24-25절) 이 대답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과 왜곡이 ‘악’임을 알려줍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실과 다른 거짓과 오해가 모든 문제를 발생시킨 악의 근원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완고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심지 않고 뿌리지 않는) 인색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은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이기적 보신(保身)주의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는 무능함과 비굴함을 갖게 한 것인데,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공포가 유혹과 유감의 실체가 됨을 알려줍니다.


    ■ 빛의 자녀와 훌륭한 아내

    복음에서 제시된 두 부류의 사람들(“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의 대조를 제2독서에서는 “빛의 자녀”와 “어둠에 속한 이들”로 표현합니다.(1테살 5,5) 이 구분이 시작되는 지점은 ‘시간과 때’에 대한 이해인데(1절) 이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마주하느냐에 따라 빛의 자녀로 살게 되기도 하고 어둠의 자녀로 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이며, ‘크로노스’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이성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는 측정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결정적이며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그 알 수 없이 지나가는 시간은 ‘크로노스’이지만 주인이 당도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의 종말’은 크로노스이지만 ‘종말의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일상을 ‘카이로스’로 사는 지혜를 제1독서는 ‘훌륭함’으로 묘사합니다.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데 그녀가 훌륭한 이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30절)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불가능성은 현대인들에게 자주 발견되는 한계이며 걸림돌입니다. 소위 ‘불통’이라고 불리는 현상은 대체로, 상대에 대한 의심이나 왜곡 때문에 발생하는데 불통 자체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심각한 것은 그로 인해 삶을 허비하고 스스로를 무기력한 좌절과 우울로 빠지게 하는 퇴행입니다.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에 해당하고,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기에, 1탈렌트를 받았다 해도 사실은 매우 큰 돈을 받은 것입니다. 그다지 부당한 대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라고 경고하십니다. 지나치게 과민한 부정과 왜곡은 불합리한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주지만 겸손과 신뢰, 그로 인한 공감과 집중은 진정한 자유와 존엄을 가져다줍니다. 현실과 주변의 조건을 곡해하여 갈등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성실하고 용감한 자세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더 좋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훌륭한’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결정적인 순간, 그 ‘카이로스’에 불현듯 구원이 다가와 그동안의 견딤과 기다림의 결실을 보상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물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삶의 중심에 둘 때에 정립되는 가치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기 때문입니다.(잠언 31,30)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가톨릭뉴스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가톨릭신문 2020-11-1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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