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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속의 여인들] 히브리 산파들과 파라오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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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608회 작성일Date 21-06-17 15:24

    본문

    요셉이 파라오의 신임을 얻어 이집트의 재상까지 오른 뒤, 히브리 민족은 이집트 땅에서 번성했다. 성경은 이집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고 전한다(탈출 1,7). 새로운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이 두려웠고(탈출 1,12) 그 두려움은 이스라엘 민족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 나아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데에 소용된다(탈출 1,11-16). 그러나 생명을 받아내는 히브리 산파는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했다. 하느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이 두려웠지만, 히브리 산파는 하느님을 두려워했다. 파라오의 두려움은 하나의 민족을 제거하는 데 집중됐지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 민족을 살리는 데 기여한다.

     

    히브리 산파들의 말은 이러했다. ‘히브리 여인들은 힘이 좋아, 가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린다’(탈출 1,19). 파라오의 억압에 히브리 산파들은 또 다른 힘, 곧 히브리 여인들의 ‘힘’을 언급한다. ‘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은 ‘하예’로, 본디 뜻은 ‘살다’, 혹은 ‘보다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다’라는 말로 이해된다. 히브리 여인들의 힘은 생명에 대한 간절함, 생명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파라오의 권력 앞에 히브리 여인들이 내세울 수 있었던 건, 제 자식에 대한, 제 자식의 생명에 대한 간절함 외에 무엇이 있었을까. 히브리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들의 생명에 대한 간절함을 파라오의 현실 권력 앞에서 용감히 증언했고 그 증언은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억압은 질기고 모질었다. 태어난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강물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하는 파라오. 그때, 레위의 딸, 익명의 한 여인이 잘생긴 아이를 낳았고, 석 달 동안 숨겨 키웠다. 남몰래 키우는 게 더 이상 힘들었던 어느 날, 여인은 왕골 상자에 아기를 뉘어 강물에 띄워 보낸다. 누군가 살려주길 바라는 간절한 어미의 마음 역시 그 왕골 상자에 담겼으리라. 이 모든 걸 아기의 누이는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은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고 왕골 상자에 뉘어진 아기를 발견한다. 파라오의 딸은 그 아기가 히브리 민족의 아들임을 바로 알아차린다. 파라오의 딸은 아기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탈출 2,6). 우리말 번역에 ‘불쌍히 여기다’라고 되어있는 히브리 동사 ‘하말’은 아끼고, 절약하는, 혹은 인정을 베푸는 등의 의미를 지닌다. 파라오의 명령으로 죽어야 할 아기가 파라오의 딸에겐 살리고 키우고 아껴야 하는 고귀한 생명으로 비쳐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소중한 감정은 민족의 문제도, 권력의 문제도, 그 권력에 기생하는 계급의 문제도 아니다. 히브리 산모들과 파라오의 딸, 그 누구에게나 똑같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다.

     

    우리는 안다. 아기의 누이는 파라오의 딸에게 다가가 젖을 물려 키워줄 유모를 소개했고, 그 유모가 바로 아기의 친모라는 사실을. 파라오의 억압 속에, 생명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지녔던 여인들의 용맹함 속에 모세는 그렇게 살았고 자라났다. 히브리 산파와 모세의 누이, 심지어 파라오의 딸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넘어선, 황제의 명령을 넘어선 용기를 통해 모세는 살았다. 죽음의 명령에 저항한 여인들의 도움으로 모세는 장차 히브리 민족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2021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가톨릭굿뉴스 자료실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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